글로벌 디지털 통화 전환기, 뒤처진 한국?
1. CBDC와 스테이블코인, 한국의 전략은 유연한가
최근 한국의 CBDC(중앙은행 디지털화폐) 실거래 테스트 추진이 금융 통제에 대한 논란과 개인의 자유권 침해 우려를 다시 부각하며 CBDC와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논쟁에 불을 지폈다.
한국은행은 ‘한강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4월부터 6월까지 CBDC 기반의 실거래 실험을 본격적으로 진행한다. 테스트는 KB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기업·부산은행 등 7개 시중은행과 10만 명의 사용자가 참여하며, 은행은 한은이 발행한 기관용 CBDC를 바탕으로 예금 토큰을 유통하게 된다. 이 토큰은 온라인 쇼핑몰, 마트, 편의점 등에서 복지 바우처 형태로 디지털 사용될 예정이다.
한강 프로젝트 개요 (출처: 연합뉴스)
이러한 정책 방향은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디지털 통화 주도권 경쟁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기에 주목할 만하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크립토 산업에 대한 명확한 지지 입장을 밝히며, 규제 완화, '크립토 차르(Czar, 총괄 책임자)' 임명,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추진 등 실질적 행보를 강화하고 있다. 해시드오픈리서치 김용범 대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같은 크립토 산업 밀어주기는 단순한 산업 육성을 넘어, 미국이 직면한 재정위기와 ‘*트리핀 딜레마’ 같은 구조적 문제를 완화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해석된다.
스테이블코인은 미래 화폐로서의 기능뿐 아니라, 국채 수요 확대, 글로벌 준비자산 다변화, 전통 금융의 새로운 성장 축이라는 다면적 가능성을 품고 있으며, 이에 따라 미국, 유럽, 일본 등은 제도화 및 입법화를 최우선 정책과제로 삼고 있다. 디지털이 주도하는 미래 경제 환경 속에서, 한국의 CBDC 실험이 글로벌 흐름과 어떤 접점을 형성하고 있으며, 스테이블코인이라는 병렬적 옵션과 비교해 얼마나 유연한 전략적 판단 위에 있는지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
*트리핀 딜레마: 국제 기축통화를 보유한 국가(현재는 미국)가 글로벌 유동성 공급과 자국의 재정 건전성 사이에서 겪는 구조적 충돌
2. CBDC와 스테이블코인: 구조의 차이와 국가의 선택
CBDC와 스테이블코인: 디지털 화폐의 두 축
우선 이야기에 앞서 CBDC와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기본 정보를 살펴보자.
스테이블코인과 CBDC는 디지털 화폐의 두 축으로, 각기 다른 목적과 구조를 지닌다. 스테이블코인은 민간이 발행하는 디지털 자산으로, 법정화폐 등에 연동해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도록 설계된다. 블록체인 기반 토큰 형태로 유통되며, 탈중앙 네트워크의 기능을 활용해 결제나 디파이(DeFi) 등 다양한 디지털 금융 서비스에 활용된다. 은행 계좌 없이도 사용 가능해 금융 낙후 지역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으며, 스마트 컨트랙트와의 연계도 용이하다. 다만 발행 주체의 신뢰성과 준비금 투명성, 규제 리스크 등의 이슈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CBDC는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디지털 법정화폐로, 국가가 가치 담보를 책임지는 안전자산이다. 스테이블코인이 이더리움 같은 공개 블록체인 기반이라면, CBDC는 통제된 분산원장 또는 중앙 서버를 통해 운영되며 규제와 보안을 우선시한다. 결제 효율성 향상과 금융 접근성 확대, 화폐 발행·관리 비용 절감 효과가 기대되며,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 효과가 보다 직접적인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개인정보 보호, 사이버 보안 우려와 함께, 시중은행의 중개 기능 약화 등 금융 시스템에 미치는 영향도 신중히 고려되어야 한다.
국가별 전략: 갈라지는 선택지
각국은 디지털 화폐, 특히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와 스테이블코인에 대해 서로 다른 접근을 보이고 있다. 다음에서 주요 국가들의 정책방향을 살펴보자.
- 한국은 지난 2월 금융위원회 주도로 가상자산 시장 참여 로드맵을 발표하고, 한국은행도 CBDC 도입을 위한 다양한 실험을 진행 중이다. 정부는 통화정책 효율성과 금융안정성 강화를 강조하지만, 일각에선 과도한 개입과 통제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최근 2단계 통합법 논의 과정에서 스테이블코인 규제 마련에 착수했으나, 현행법으로는 지급결제 수단과 투자자산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포괄하기 어려워 자본시장법과 전자금융거래법 모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따라 독자적 규제체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 미국은 CBDC보다 스테이블코인 활성화를 선호하는 대표적 국가로, 트럼프 정부는 CBDC가 정부의 절대적 통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도입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대신, 3월 미 상원 은행위원회가 스테이블코인 법안 ’지니어스(GENIUS Act)’를 가결하는 등 스테이블 코인 규제 개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 반면 중국은 정부 통제가 힘든 스테이블코인에 대해 폐쇄적인 정책을 유지 중이다. 이미 디지털 위안화(CBDC)를 일부 지역에서 실사용 중이며, 이를 통해 현금수요 감소 대응과 위안화 모니터링 및 국제화를 추진 중이다.
- 유럽연합은 올해 10월까지의 CBDC 도입 일정을 공개하며 연내 출시를 예고했다. 동시에 작년 12월 시행된 MiCA 법안을 기반으로 스테이블코인 관련 규제도 마련하며, CBDC와 스테이블코인 양측을 아우르는 균형 잡힌 규제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3. 디지털 통화 정책의 이면과 전략적 선택지
CBDC 도입은 표면적으로 통화정책의 효율성과 금융시스템 안정성 강화를 위한 정책으로 설명되지만, 그 이면에는 국가 차원의 보다 직접적인 통제력 확보라는 민감한 동기가 자리하고 있다. 가령, CBDC는 모든 거래를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어 조세 회피 및 불법 자금 흐름을 통제하기에 용이하지만, 동시에 금융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국가의 과도한 개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는다. 특히 미국은 이러한 점을 근거로 CBDC에 부정적이며, 현재 연준의 CBDC 발행을 금지하는 법안(HR 1919)이 하원 위원회를 통과한 상태다.
CBDC 발행 금지 법안 HR 1919
대신 미국은 스테이블코인 생태계 육성에 전략적 무게를 두고 있으며, 그 이면엔 단순한 금융 혁신이 아닌 디지털 달러의 글로벌 영향력 확대와 국채 수요 유지라는 복합적인 목적을 드러낸다. 특히 미·중 패권 경쟁 속 중국의 국채 매도로 수요 기반이 약화되자, 미국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를 ‘제2의 국채 수요자’로 육성 중이다. 이미 테더는 1,100억 달러 이상의 미 국채를 보유하며 독일·멕시코보다 더 큰 국채 보유 주체로 성장했고, 발행사의 준비금 자산에 단기 국채 보유를 의무화하는 법안도 추진하고 있다.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은 글로벌 결제 시스템에서 디지털 달러의 지위를 높이는 동시에, 중국의 국채 이탈로 인한 수급 공백을 메우는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중국은 강력한 중앙집중형 디지털 위안화를 추진하며 디지털 통화의 내부 통제와 외환 정책 수단화를 시도하고 있다. 진영에 따라 각기 다른 전략이 펼쳐지는 가운데, 한국이 CBDC에 지나치게 집중한다면 오히려 국제 디지털 금융 질서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스테이블코인 공급량 추이 (출처: 듄 애널리틱스)
주요 스테이블코인 발행량 및 국내 거래소 원화 예치금 규모 (출처: Four Pillars)
현재 글로벌 가상자산 시장에서의 한국시장 영향력과 국내 거래소 원화 예치금은 상당한 수준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도입은 단순한 금융상품을 넘어 디지털 경제 내 통화주권을 유지하고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질서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 될 수 있다. 현재 스테이블코인 거래는 대부분 USDT, USDC 등 달러 기반 토큰에 집중되어 있으며, 국내 사용자가 암호화폐 서비스를 이용할 때도 원화 대신 달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 같은 흐름이 지속된다면 원화의 사용성은 약화되고, 디지털 자산 시장 내에서 한국의 주도권도 점차 축소될 수 있다. CBDC 위주의 논의에서 벗어나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도입하고 관련 규제를 명확히 정비한다면, 디지털 결제 수단으로써 원화의 활용도를 높이는 동시에, 글로벌 금융 규제 논의에서의 존재감도 키울 수 있다. 나아가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확장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자, 향후 디지털 금융 주도권 확보를 위한 실질적 대응 전략으로 작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