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더리움 로고 (사진=이더리움 홈페이지)
글로벌 가상자산 시장 내 한국 시장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다. 대중의 높은 관심과 풍부한 거래량을 바탕으로 때로 중요한 모멘텀을 만들어 내며 주요 웹3.0 프로젝트의 손꼽히는 핵심 공략 지역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더리움같이 글로벌 표준이 되는 메인넷 및 주요 인프라 서비스를 만드는 데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한국 웹3.0 생태계에 혁신과 의지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풍부한 개발 인력 풀과 새로운 시도에 대한 에너지로 정평이 나 있다. 얼마 전 열린 코리아블록체인위크(KBW)가 괜히 글로벌 최대 블록체인 행사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것이 아니다.
하나의 혁신이 글로벌 표준 또는 기저 인프라가 되기 위해서는 혁신 자체의 뛰어남도 중요하지만 초기 보급 및 채택률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과거 비디오테이프 표준 전쟁(VHS vs VCR)과 최근 친환경에너지 차량(전기차 vs 수소차)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국내 웹3.0 스타트업의 혁신이 글로벌로 뻗어나가기 어려운 것은 이런 초기 인지도 확보 및 채택 여부에서 힘을 못 쓰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블록체인 기술이 탈국경적 혁신이라고 하지만 결국 시작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퍼져나가는 데 있어 언어장벽과 물리적 거리를 극복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무엇보다 이런 제약이 초기 마케팅에 원동력이 되어줄 수 있는 대형 자본에 대한 접근성을 낮게 만드는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 트렌드를 주도하는 프로젝트 대부분이 미국 소재 팀 또는 미국 자본 주도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더리움과 솔라나가 러시아인에 의해 개발됐지만 결국 미국 자본 주도로 성장했다. 아발란체, 니어, 앱토스, 수이 등 주요 메인넷 창업자들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의 경험을 두루 갖추고 있어 대형 자본에 대한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높았다고 볼 수 있다.
대형 자본에 대한 접근성이 중요한 이유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웹3.0 생태계에 알려지고 채택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극초기 스타트업이 1조원이 넘는 기업가치를 인정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숫자 자체가 투자자의 명성과 더불어 뉴스와 함께 커다란 마케팅 효과를 가져다준다. 이와 더불어, 해당 대형 투자자가 기존 투자한 다른 기업과의 연계를 통해 아이디어의 보급∙채택을 유도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한국에도 글로벌 생태계를 구축에 성공했던 메인넷이 있었다. 바로 루나 사태로 악명이 높은 테라(Terra) 블록체인이다. 지금은 비록 오명으로 얼룩진 한국 블록체인 업계의 흑역사가 되었지만, 과거 테라가 글로벌 블록체인 업계에 미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알고리즘 기반 스테이블코인 서비스를 시작으로 테라 생태계는 수많은 스타트업과 아이디어의 산실이 됐고, 한국이 글로벌 트렌드를 주도하는 이변을 만들어 냈다.
이후 벌어진 각종 논란을 떠나, 그 위에서 구축되고 이내 사라져 버린 개발 생태계는 토종 블록체인 인프라를 응원하는 측면에서 너무나 아까운 결과물이다. 그런데 그 테라 역시도 초기 점프(Jump)라는 해외 대형 자본의 지원을 받아냈다는 배경이 있다.
한편, 범용적인 글로벌 인프라를 만들어 내는 데는 지지부진하지만 대신에 한국은 게임사를 중심으로 '엔터프라이즈 블록체인'이 강세를 보인다. 엔터프라이즈 블록체인이란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같은 퍼블릭 블록체인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노드 참여가 완전히 개방되지 않고 기업 등 특정 주체가 어느 정도 생태계를 통제하는 블록체인 시스템을 뜻한다.
엔터프라이즈 블록체인은 탈중앙화 개념에 있어 타협한 부분이 다소 있지만, 의도하는 작업 속도와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비교적 느리고 비싼 이더리움의 대안으로 차세대 메인넷이 등장하긴 했으나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트렌드를 추종하기 어렵고 가스비(메인넷 사용료)의 불확실성을 감내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현재까지 컴투스의 엑스플라(XPLA), 넷마블의 마브렉스(Marblex) 등 여러 게임 전용 메인넷이 기존 흥행 게임 지적재산권(IP)을 기반으로 론칭돼 있다. 원론적으로 이런 특수목적 블록체인이 그나마 등장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주도 기업의 자본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국내 웹3.0 프로젝트가 전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도움이 필요하지만, 현재 국내 웹3.0 벤처 투자 여건은 척박하기만 하다. 앞서 해외 대형자본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나, 사실 한국에 자본과 이들의 관심이 부족하진 않다. 국내에도 유수의 글로벌 기업이 존재하지만 이들이 웹3.0 생태계에 투자할 수 있는 제도적 인프라나 규제가 미비한 영향이 크다.
최근 일본 최대 통신사업자인 도코모는 웹3.0 기술에 무려 5.6조원을 투자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일본 정부의 벤처 육성 계획과 더불어 일본의 웹3.0 시장이 주목받고 있는 중요한 배경이기도 하다. 한국 정부 역시 블록체인 사업에 대해 마냥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육성 의지가 상대적으로 큰 편에 속한다. 국내 웹3.0 생태계에 부족한 것은 혁신과 자본이 아니라, 이 둘을 연결할 수 있는 작은 틈일 수 있다. 급격한 변화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지사지만 기업의 웹3.0 생태계 참여는 그 작은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원문 링크 : 딜사이트 <한국에서 '이더리움'이 나오기 어려운 이유>